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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와(定窩)

영일정씨 지수종택(迎日鄭氏 篪叟宗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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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정와(定窩)
  • 글자체 행서(行書)
  • 크기 31.7x57.8x2
  • 건물명 정와(定窩)
  • 공간명 영일정씨 지수종택(迎日鄭氏 篪叟宗宅)
  • 서예가
  • 위치정보 영천시 화북면 횡계리 영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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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와(定窩)

정와(定窩)


정와(定窩)는 훈수(塤叟) 정만양(鄭萬陽, 1664~1730)이 1704년(숙종 30)에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 횡계구곡 중 제2곡에 건립한 정자의 편액이다. ‘정(定)’은 지향할 바를 정했다는 의미로, 『대학장구』의 “머물러야 할 곳을 안 뒤에야 방향이 정해지고, 방향이 정해진 뒤에야 마음이 고요해지며, 마음이 고요해진 뒤에야 편안해지고, 편안해진 뒤에야 생각이 정밀해지며, 생각이 정밀해진 뒤에야 머무름을 얻을 수 있다. [知止而后有定 定而后能靜 靜而后能安 安而后能慮 慮而后能得]”고 한 데에서 취한 말이다.

한편 훈수 정만양과 아우 지수(篪叟) 정규양(鄭葵陽, 1667~1732)이 횡계구곡 일대의 풍광을 읊은 「계장사십영溪莊四十詠」의 제 33수 정와(定窩)라는 연구시를 통해 공문(孔門)의 핵심 가치 중에 하나가 바로 ‘머물러야 할 곳을 안다[知止]’임을 강조하였다. 이는 훈수·지수 역시 학문의 요체가 여기에 있음을 알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함을 다짐하였다.

정(定)의 뜻을 그대는 아는가
공부를 나는 한 적이 없다네
공자의 문하에서 가르칠 때는
지지를 가장 먼저 일컬었다네

定義君知否(篪)
工夫我未曾(塤)
孔門垂敎日(篪)
知止最先稱(塤)

정와는 정재(定齋)로 불리기도 하는데, 훈수 정만양이 제자들이 많아져 정와에서 이들을 수용하기 어렵게 되자 1716년(숙종 42)에 제4곡에다 정자를 크게 확대·중수하고 옥간정(玉磵亭)이라 명명하였다.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된 편액은 정와와 정재 두 개인데, 이 편액은 전자이다.

도도히 흐르는 필세는 장강의 물결인 듯 머뭇거림도 없고 망설임도 없다. 크지 않는 편액 속에 힘찬 대하(大河)의 흐름이 있다. 필묵이 지나온 자취는 나타난 형태에 의탁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형태만 보고 그 자취(지나온 과정)를 보지 못하다면 형태가 오히려 장애물이 된다. 형상을 보고 지나온 과정을 느끼는 것이 서법 감상의 중요한 한 방법이라고 본다. 미끄러질 듯 윤기 있고 기름져 보이지만 물결에 밀려 나아가는 듯한 역동적인 흐름의 기세만큼은 압권이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영일정씨 지수종택(迎日鄭氏 篪叟宗宅) 소개


영천의 영일정씨(迎日鄭氏) 훈·지(훈수 정만양, 지수 정규양) 집안은 고려 때 추밀원지주사를 지낸 정습명(鄭襲明, ?~1151)을 시조로 한다. 정습명은 고려 중기의 명신으로 인물이 비범하고 국량이 컸으며, 학문과 문장에도 능통하였다. 예종·인종·의종 3대에 걸쳐 임금을 보필하여 벼슬이 추밀원지주사에 이르렀고, 김부식과 함께 『삼국사기』를 편찬하는 일에도 관여하였다. 이 영일정씨의 한 갈래가 영천으로 처음 입향한 것은 시조 정습명의 8세손인 정인언(鄭仁彦) 대였다. 정인언은 고려 말에 벼슬이 봉익대부전공판서에 이른 인물인데,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77~1392)의 종증조이다. 고려의 운세가 다할 무렵 포은 정몽주의 충절로 인한 멸족의 화를 피하기 위해 아들 광후(光厚)와 함께 영천의 전촌(지금의 도동)에 터를 잡아 은거하였다. 정광후는 문과에 급제한 뒤에 고려 말에 상주 목사를 역임한 바 있었다. 그는 조선이 개창된 이후 협력을 요청받아 고심 끝에 출사에 응함으로써 가문을 보존하는 길을 택하였다.

12세손 정종소(鄭從韶)는 1447년(세종 29) 문과에 급제한 뒤 이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단종 복위운동으로 인한 병자옥사가 일어나자 낙향하여 은거하였다. 그 후 여러 차례 벼슬이 내려졌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문장과 절행이 있어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에게서 오천정선생(烏川鄭先生)이란 추존을 받았다. 정종소의 증손 정윤량(鄭允良, 1515~1580)은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으며 학행이 있고 성리학 탐구에 전심하여 주변에 명망이 있었다. 또 자양서당을 건립하여 후진양성에 힘썼다. 정윤량의 아들 호수(湖叟) 정세아(鄭世雅, 1535~1612)는 훈·지 형제의 5대 조이다. 그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촌의 자제들을 동원하여 편대를 정하고 격문을 작성하여 900여 명에 달하는 의병을 규합한 뒤에 의병대장이 되었다. 그해 8월 권응수(權應銖), 정대임(鄭大任)과 함께 영천 박연(朴淵)에서 왜적과 싸워 큰 전과를 거두었고 이어 영천성을 수복하였다. 다시 경주의 왜적을 격퇴하여 경주를 수복하였다. 이때 장남 정의번(鄭宜藩, 1560~1592)이 적에게 포위된 부친을 살리고 자신의 종 억수와 함께 장렬히 전사하였다. 영천과 경주를 회복함으로써 경상도 동북부 지역이 온전할 수 있었다. 이듬해 평양과 서울이 차례로 수복되자 군사를 조희익(曺希益)에게 맡기고 자양으로 돌아와 후진양성에 힘쓰다가 1612년(광해군 4) 세상을 떠났다. 정세아는 4명의 아들 의번, 유번(維藩), 안번(安藩), 수번(守藩)을 두었는데, 이 대에서 가문이 크게 번성하였다. 특히 셋째 아들 안번의 현손 훈수 정만양과 지수 정규양이 출현하여 영남 남인 사회에서 학문적으로 큰 족적을 남겼다.

훈·지 형제는 어려서부터 20여 세 때까지 종조부인 학암(鶴巖) 정시연(鄭時衍)에게서 가학을 통해 학문의 기초를 닦았다. 이후 30대 초반에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1627~1704)과 직접적인 학연을 맺으면서 문하에 입문했는데, 이현일이 갑술환국으로 실각하여 광양의 유배지에 있을 때였다. 그 사제 간의 만남은 얼마 가지 못하고 이현일의 사망으로 끊어졌다. 이현일과의 인연은 그 아들인 밀암(密庵) 이재(李栽)와의 교분으로 이어져 계속 이현일의 영향권 내에 속해 있었다. 훈·지 형제는 일찍부터 학문을 닦으면서 후진 양성에 주력하는 은거의 길을 택하였다. 그들은 1701년(숙종 27) 30대 후반에 영천의 대전리에서 약 50리 떨어진 보현산 자락의 횡계리로 거처를 옮겨 육유재와 태고와를 짓고 함께 은거하였다. 1707년(숙종 33) 40대에는 근처의 계곡에 고산사를 짓고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1716년(숙종 42) 50대에는 옥간정과 진수재를 지어 학문 연구와 강학의 장소로 삼아 절차탁마하였다. 한창 학문이 무르익었을 때는 갈암을 잇는 영남의 대표적인 학자로 성장하였다. 그 결과 이현일의 사후 ‘북의 밀암, 남의 훈수’라는 말이 운위되었을 정도로 당대에는 이재와 함께 갈암 학맥을 대표하면서 영남 유림을 영도하는 위치에 올랐다.

‘정와’ 또는 ‘정재’는 후학 양성을 위해 1716년(숙종 42) 확대·중수되면서 옥간정으로 탈바꿈하였다. 옥간정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70호로 지정되었다. 옥간정은 횡계구곡 중 제4곡에 해당하는데, 계곡이 굽어 돌다가 만든 영과담 가에 세워졌다. 주변에 범상치 않은 여러 바위들이 계곡물과 어우러져 풍광이 매우 빼어나다. 정자는 횡계의 계곡 바닥의 땅의 높낮이를 있는 그대로 이용하여 전면은 다락집, 뒤쪽은 아담한 단층집으로 꾸민 것이 특징이다. 좌협칸 뒷면으로 2칸 온돌방과 서재 1칸을 두어 전체적으로 ㄱ자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자연환경에 순응한 독특한 평면 구성과 창호 수법 등이 특징적인 건물이다. 현재 당내에는 성재(誠齋)와 정재(定齋) 등의 편액과 다양한 형식의 제영시가 걸려 있다.

참고문헌
  • 『훈지양선생문집塤篪兩先生文集』
  • 우인수, 『임란의병의 함, 영천 호수 정세아 종가』,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2013.